거울상에 비친 욕망과 빛
: 미디어아티스트 이태헌의 작품 읽기
- 강혜승(상명대학교 초빙교수)
거울 앞에서 초상화를 그리듯 작가 이태헌은 거울 앞에서 글을 쓴다. 작가의 글은 텍스트로, 이미지로, 사운드로 변주된다. 미디어아티스트로 호명되지만, 그의 작품에서 디지털기술은 구성 요건에 불과하다. 작가가 예술로서 묻고자 하는 바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맞닿는다. 상징질서 안에서 실재의 자기(self)를 좇고자 하는 존재론적 욕망이다. 인간 소외와 분열을 끊임없이 글쓰기로 확인했던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의 작품과 겹쳐지는 지점이다. 물론 이태헌의 글은 21세기의 방식으로 지각된다.
작품을 살피기에 앞서 질문 하나. 나를 인식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에 따르면 거울 앞에서 “어! 나네” 방긋 웃던 순간부터다. 제 것인 줄 모르고 팔다리를 휘두르다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리던 아기는 생후 6~12개월쯤 거울을 통해 비로소 ‘이게 다 내 거’라는 신체의 총체성을 확인한다. 온전한 자신을 마주한 환희의 찰나, 라캉은 찬물을 확 끼얹는다. “착각이야.” 라캉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하다. 분열된 주체가 발견되는 순간이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보는 주체인 나는 역설적으로 내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존재다.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를 만날 수가 없다. 그런데 거울 앞에서 마주하는 자아상은 상상적 정체성이다. 이상이 그의 시 <거울>에서 읊조렸듯 만질 수도 없는 나의 환영이다. 한마디로 파편적 이미지일 뿐이다. 나를 대면한 줄 알았지만 그렇게 나로부터 소외된다. 내가 오른손을 내밀면 거울 속 나는 왼손을 내민다. 악수도 받을 줄 모르는 허상이지만, 그런 거울 앞에 또다시 나를 세우는 이유는 유일한 자기 반영의 창인 탓이다.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단편영화로 데뷔한 이태헌은 첫 작품에서부터 <자화상>(2012)을 그리고자 했다. 거울 없이는 자화상을 그릴 수 없으니, 이때의 영화는 이를테면 말하는 거울 같은 장치다. 작가는 자신을 투영한 영화 속 화자(話者)를 통해 꿈을 좇는다. 생각을 거듭한들 도무지 잡히지 않는 꿈이다. 주인공은 행복을 그리려던 도화지를 결국 채우지 못했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작가는 또다시 도화지를 펼칠 게 뻔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가닿지 못하는 실재를 이상도 시 <꽃나무>에서 욕망했다.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이태헌은 꿈을 닮은 실재와 현실을 중재해보기로 전략을 바꾼 듯하다. 20세기 기술인 영화 대신 미디어아트로 눈을 돌리면서 작가는 꿈과 현실을 오갈 통로로 가변현실을 본격 생성했다. 영국왕립예술대학 석사과정을 마치던 해의 작업 <You, the one>(2020)에서 거울을 기표로 소외에서 분리로 나아가는 주체를 빛을 통해 가시화했다. 거울필름을 붙인 마네킹 두상에 영상이 투사되고 벽면에는 디지털 그림자가 투영되는데, 타자의 시선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체화 과정 자체라 할 수 있다. 오브제 두상에 투사되는 빛은 관객들이 터치패드를 통해 조정할 수 있도록 인터렉션 장치를 연동했다. 관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타인에게 영향받는 주체를 이야기했다. 공간을 가득 채운 빛은 타자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같은 해 팀프로젝트로 작업했던 <Orácŭlum(신관)>에서 작가는 관객에게 직접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신의 예언을 듣는 고대의 신관이 빛으로 구현된 가상의 공간에서 관객은 인공지능(AI) 챗봇 ‘오라쿨룸’과 대화하며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이듬해 작품 <Log>는 그 연장선의 작품으로, 언어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는 사회화 과정을 상기시킨다. 스크린에 투사된 굽이치는 파도 속에서 관객은 공간을 둘러싼 입체음향에 노출되는데, 이때의 소리는 우리가 매일같이 듣는 미디어의 공적 메시지들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표현을 빌리면, 무정형의 존재였던 우리는 국가로부터, 사회로부터, 부모로부터 사회적 언어를 습득해 범주화된 개인이다. 자아상은 사실 오인된 자아 이미지라는 얘기다.
오롯이 자기이고자 하나 결국 사회적으로 결정된 분열된 나를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고통과 불안을 수반한다. 2022년의 <낙관주의 연습>은 관객에게 거울상을 마주하며 ‘낙관하기’를 제안한 작품이다. 거울 앞 의자에 앉아 분열된 나를 마주하는 나만의 공간이 빛의 효과로 연출됐다. 마치 꿈속 같은 가상의 공간이자, 자신의 이미지에 몰입하는 나르시시즘적 공간이다. 물에 비친 스스로에 매혹돼 익사한 나르키소스 신화 속 시각구조를 닮은 까닭이다. 작가 역시 행위자로 카메라 앞에 앉아 거울상을 마주했다. 렌즈 앞에서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린 작가는 불안을 한숨으로 뱉어냈다.
사실 작가의 시선은 초기 <자화상> 때부터 내내 자신을 향했다. 애써 드러내지 않았던 정체성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낙관주의 연습>에 이르러 관객 앞에 불안의 실체를 드러낸 셈이다. 보고 보이는 시각구조를 담는 미술에서 정체성에 대한 탐색은 본질적이며 근원적이다. 나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나는 또 어떻게 보이는지 미술은 매체를 달리하며 답을 구하고자 했다. 과거의 예술이 예술가의 정체성을 창조적이고 고귀한 그 무엇으로 이상화하고 신화화했다면 현대의 예술은 유동적인 정체성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려 한다. 0과 1이라는 숫자 코드로 자유롭게 변주되는 디지털 매체는 분열된 주체를 그리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이다.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마주했던 작가는 <Reflecting & Reflected(반영하고 반영된)>(2022)에서 화해를 청했다. 스크린에 투사된 붉은 반원과 푸른 반원은 내 안의 서로 다른 나이기도, 서로 다른 너와 나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기에 대한 화해의 손짓이기도, 타자에 대한 화해의 몸짓이기도 하다. 차이를 틀림으로 혐오하지 않고, 다름으로 인정할 수 있기를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로 표현했다. 현악 4중주팀 ‘아르캉시엘’과 협연했던 공연 <피아졸라와 드보르작>(2023) 역시 마음의 상처를 다독이고자 한 소통 방식이다. 작가는 현악기의 선율과 곡의 심상을 이미지로 변환하며 디지털이라는 메타 매체를 관객이 공감각으로 경험하기를 바랐다.
작가의 관계 지향은 전작 <& Credit>(2021)에서도 엿보였다. 광주문화재단의 입주작가로 활동하던 당시, 영화로 치면 장면 마지막에 이름을 올리는 제작진들의 존재에 문득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영화처럼 제작비를 지원받는 미술작품은 예산을 집행하는 행정팀부터 제작을 돕는 실무팀까지 많은 종사자들의 손을 빌리게 된다. 작가는 하나의 작품이 관객 앞에 선보이기까지 여정을 함께 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재단 출입구 앞에 5m 너비의 조형물을 설치했다. 나비를 닮은 거울필름 조각 7000개가 빛을 받아 너울댔다. 반짝거리는 날갯짓이 고마운 이들에게 닿기를 바란 작가의 마음이었다.
2023년 마지막을 장식할 이태헌의 작품은 강릉문화재단에 설치된 <너에게 닿기를>이다. 작가의 주요 매체인 거울과 입체음향, 프로젝트 맵핑이 동원된다. 올해 하반기를 강릉에서 보낸 작가는 바다를 마주하며 자기 목소리를 듣고자 했다. 온통 코드화된 디지털 환경의 현실과 빛의 환영을 생산하며 실재에 다가가고자 하는 디지털미디어의 역설을 고민한 흔적이 작품에 담긴다. 관객은 작가의 내면이 반영된 거울방으로 안내돼 바다라는 자연 앞에 선 유약한 존재로서의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될 수 있을까. 작가는 “당신에게 닿고 싶다”고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이태헌 <& Credit>, <Archiving+> 비평글
이태헌 작가의 작업은 해시태그로 시작되어 해시태그로 마무리된다. 작업실의 벽면에는 작업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사용한 단어들이 포스트잇으로 빼곡하게 붙어 있다. 광주문화재단 미디어 레지던시 1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Archiving +> 영상에는 지난 10년 간 거쳐 갔던 작가들이 “미디어 아트란 무엇인가요?” 라는 작가의 물음에 해시태그를 답으로 달아서 영상으로 전시되었다. 해시태그는 게시물의 분류와 검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메타데이터이다. 해시 기호(#) 뒤에 단어나 문구를 띄어쓰기 없이 붙여 쓴다고 해서 해시태그라는 이름이 붙었다.1) 그런데 작가의 작업실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에 적힌 낱말형식의 작가노트, 미디어 영상에 흘러나오는 키워드, 그리고 실제 웹 공간에서 사용되고 있는 해시태그가 모두 동일한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해시태그는 점차 비대해지는 온라인 정보 공간에서 콘텐츠의 검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붙인 태그이다. 여기에는 콘텐츠에 대한 자기 판단과 함께 검색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명명 키워드가 장착되어 있다. 그러므로 해시태그는 낱말, 단어, 키워드, 시구, 인용구 등의 다른 텍스트와는 달리 언제나 다른 이들로부터 존재가 파헤쳐지기를 바라는 일종의 타자의 시선이 항상 배경 맥락으로 존재한다. 만약 이름 붙이는 자가 콘텐츠가 방대한 웹 우주에서 미아로 남길 바란다면 해시태그는 붙여지지 않을 것이다.
작업실 한 쪽 벽면에 ‘art’로 시작한 포스트잇 작업 노트는 “‘무조건 예뻐야해’_마감, 마감, 마감” / ‘문화/예술’ –‘왜 예술을 하는가?’ / ‘Story?’ - ‘예술의 이유’ (·······) 등으로 이어진다. 분절된 단상과 아이디어들은 작업의 형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Archiving +> 에서는 참여 작가들이 제공한 미디어 영상과 함께 작가의 답변이 해시태그 형식으로 흘러나온다. 1기 진시영 작가(2012)의 경우 “나에게 미디어 아트는 일상이다”라는 답변과 함께 #사람, #에너지, #흐름, #휴머니티 등의 해시태그들이 흘러나오는데, 이 해시태그들은 그 자체로는 맥락과 주체를 관통하기 힘든 ‘포스트 모더니즘적’ 나열 감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신도원 작가의 답변 “나에게 미디어 아트란 현실과 가상이 하나가 되는 것” 에는 #추상, #미디어아트, #현대미술 등의 해시태그가 뒤따른다. 여기에서 역시 두 가지의 맥락이 엿보이는데, 하나는 N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 정체성을 해시태그로 명명할 때 보이는 단편적인 세계관이고, 두 번째는 미디어아트를 스스로 규정하는 데 엿보이는 모호성으로, 이것은 아직도 현대미술 장르에서 미디어아트가 가지고 있는 규정이 명확하지 않음을 유추할 수 있는 단초로 역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태헌 작가의 전작 <& Credit>은 좀 더 작가의 개인적인 동기와 의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광주문화재단 미디어 레지던시 과정에서 제작되었으며, 프로젝션 맵핑 설치 작품이다. 5m*2m*1m 사이즈의 골대처럼 생긴 구조물이 있다. 이 구조물에 촘촘히 매달려 있는 7,000 피스의 작은 거울들이 있다. 구조물에는 작가가 만든 세 개의 영상이 틀어져 나오고, 구조물에 매달린 거울들은 그 영상을 반사시키고 주변 거울에 투사시켜 작가만의 독특한 프로젝션 맵핑을 구성한다. 영상은 Prime Water, Seeds of Zeitgeist, Time Paradox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영상은 작가가 레지던시 기간 중 재단 직원들과 나누었던 대화에서 영감을 받은 내용, 미디어 아트에 대해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개념 등이 담겨 있다. 구조물에 매달린 거울 하나하나는 이를테면 작업을 구성하기 위해 동원된 모든 인력, 영감의 원천이 된 뮤즈, 그리고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창작 네트워크 안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앤드 크레딧’은 크레딧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창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엔딩 크레딧’과 차별화 하였다.
작가는 이 작품을 스스로 “문화/예술 수호자들을 향한 존경을 담은 작품이다. 코로나 대유행 시기에도 문화/예술이 계속해서 흐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모든 관련 행정가, 스텝, 작가, 그리고 관객분들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작가의 예전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힌트들이 존재한다. 작가는 2015년 좀비를 소재로 영화를 제작하고 연출한 경험이 있는데, 당시 4박 5일 동안 잠도 못 자고 고생했던 스텝들에게 임금을 제공하지 못했고(사전 협의 하에 이루어진 사항),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다고 한다. 이 경험은 작가에게 트라우마(trauma)로 남아 있으며, 작가는 여기서 ‘크레딧(credit)’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의 크레딧은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부터 감독, 그리고 작은 역할의 스텝까지 이름을 기록하며 영화의 말미에 영광스럽게 등장한다. 작가는 영화현장에서의 경험과 이번 레지던시 경험에서도 재단의 행정 직원들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작가 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이런 크레딧에 대한 작가의 단상은 이번 작업의 해시태그로 작용하게 된다.
종종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허무감에 빠져드는 작가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작가의 작업실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의 ‘긍정’과 ‘미래적 회복’이라는 단어는 이런 작가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긍정’의 사전적 정의는 ‘그러하다고 생각하여 옳다고 인정함’이다. 이것은 상황과 사건에 대한 낭만적이고 장밋빛 해석을 하는 것이 긍정적이라고 칭하는 선입견에 대한 놀라운 반전이다. 즉, 긍정은 사물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작품을 통해 운명이 부정적인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에 따라 충분히 덜 나쁜 것이 될 수 있고 나아가 좋은 것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작가가 이야기 하는 작품의 쓰임새이자, 작가로서 작품 그리고 관객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2) 또한 운명론자인 작가는 이와 관련하여 <& Credit>의 시작을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서 찾고 있다. 작가는 우주와 같은 세상과 웹상에 던져진 자신의 ‘현존재’를 의심하고, 이 의심은 오로지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도구로부터 구원된다. 작가는 종종 비관주의에 휘말리며 테트리스처럼 쌓인 작가노트 포스트잇의 밑바닥을 의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교류 맺는 사람과 사건, 사물들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미래적 회복’을 성취하게 된다.
조숙현 (미술비평가)
1) 출처 : 용어로 보는 IT (네이버 백과사전)
2) 작가노트 중 https://www.taeheonlee.com/project-note-and-credit